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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오해할 틈이 없었음 뿐임을, 세상을 유유히 살아가고 있던게 아니라 그것과 마주칠 순간을 필사적으로 유예하고 있었음 뿐임을 - 2014 이상..

필사/책

by Kate.J 2014. 3. 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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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이상문학상 작품집 

편혜영 몬순 외 여덟명 

문학사상



편혜영 · 몬순

26

아기를 잃고 나서 태오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여전히 기분을 상하게 하는 상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다. 그 무렵 태오는 일부러 상사가 빈정대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의 몸 전첼ㄹ 꽉 채워버린 분노와 함께. 틈만 나면 그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했다. 그러면 분노와 원망이 서서히 뇌로 차올랐다. 이해하기보다는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게 쉬워서인 것 같았다. 

유진 탓이 아니었다. 사고였다. 태오는 그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떄가 있었다. 유진이 아무런 애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당혹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모습이라거나 아이가 생긴 일을 두고 실수라고 했던 말이 떠오를 때면 그랬다. 갑작스럽고 낯익은 불쾌감이 태오를 감쌌다. 사람들이 아이를 예쁘다고 하거나 쓰다듬어주면 유진의 표정은 잠깐 부드러워졌는데, 아이를 향한 자부는 아니었따. 유진은 아기가 준 피로감에 몹시 화가 나 있었고, 태오가 보기에는 명백히 우울증임에도 부인하며 화를 냈고, 그 화를 태오와 아기에게 풀었다. 



편혜영 · 저녁의 구애 

56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하는 것은 순전히 김이 검은 밤의 국도변에 홀로 서 있으며 근처에 빛을 내는 것이라고는 장례식장의 간판과 불타는 트럭뿐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간판은 멀리서도 훤히 보이도록 빛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건물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어둠에 묻힌 도시 전체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모든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지진에 대비한 훈련을 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지진 발생 시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지도를 부적처럼 품고 다니는 도시에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재난에 대비한 우동과 어묵통조림이 이 도시에서 오래 장사한 사람도 모르는 어떤 곳에서 팔리고 있고 불분명한 재난의 위협 속에서 누군가는 단지 노환으로 죽을 듯 죽지 않으며 계속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만약 그가 사는 도시였다면, 그런 불안과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여자에게 여전히 무뚝뚝하게 굴었을 것이고 간혹 친절하게 굴고 나서는 여자가 오해할까 봐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여자가 입을 열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평이한 질문으로는 자신의 고백이 여자를 기쁘게 했는지 들뜨게 했는지 못마땅하게 했는지 화가 나게 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김은 여자에게 그 말을 하는 내내 자신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는데, 그 느낌 때문에 고백의 일부가 진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따. 

그러나 진심과 상관없이, 여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는 두려움이 점지해준 고백 때문에 곧 부끄러워질 것이며 어떤 말도 돌이킬 수 없어 화가 날 것이고 그 말이 불러온 상황과 감정을 얼버무리려고 애를 쓸 것이며 그럼에도 당시 마음에 인 감정의 윤곽이 무엇인지 헤아릴 것이었다. 그 생각에 김은 갑자기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김숨 ·법法 앞에서

107

법원 계단을 부단히 오르는 사람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계단은 오래 산 나무의 나이테나 차랑차랑 번진 물결무늬처럼 완완緩緩 민틋하지만 결코 낮지 ㅇ낳다. 이 층 높이쯤 되는 데다, 중간에 계단참까지 있다. 357호 법정으로 가는 사람일까. 방금 자신 앞을 지나쳐 법원 건물 쪽으로 다급히 걸어가는 사람마저 그는 357호 법정을 찾아가는 이 같다. 

허공을 습자지처럼 덮은 구름이 찢기고, 그 새로 발간 태양이 나면서 그의 그림자 윤곽이 뚜렸해진다. 오후 두 시 방향으로 뻗은 그의 그림자가 하필이면 법원 건물을 화살표처럼 가리키고 있다. 어서 화살표 방향으로 걸어가라고, 누군가 뒤통수에 대고 사금파리 같은 침이 튀도록 명령하는 소리가 그는 들리는 듯하다. 



천명관 · 파충류의 밤

194

이제 십 리쯤 왔을까? 그녀는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천 리를 가야 하는 길에서 겨우 몇 걸음 뗀 기분이다. 불면증 환자에게 시간은 무한히 이어진 하나의 선일 뿐, 아무런 막이 없다. 어두운 독방과도 같은 불면의 밤이 지나면 녹초가 된 채 온종일 책상 앞에 안자 충혈된 눈으로 원고를 들여다봐야 하는 낮이 찾아온다. 휴식도, 갱신도, 단절의 순간도 없는 형벌의 시간이 황도를 따라 끝없이 흘러간다. 



윤고은 · 프레디의 사생아 

256

우리는 정말 인사를 하고 헤어졌따. 그가 헤밍웨이의 집에 살았던지, 짐 모리슨이었는지는 여전히 기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끝까지 카메라를 조심하라고 마랬다. 난 괜찮았다. 카메라는 이미 수거해갔꼬, 남아 있는 카메라도 없었지만, 설사 있다 해도 관계없었따. 카메라를 수거해간 후에도 나는 종종 카메라를 의식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으니까. 나를 관찰하는 카메라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게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편했다. 이미 몸에 배어버렸기 떄문에, 딱히 힘들 것도 없었다. 그 카메라는 홍보용이기도 했고, 기록용이기도 했지만, 동거용이기도 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다는 사실이 가끔은 위로가 될 때도 있는 법이다. 



이장욱 ·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268

그게 아버지의 간단명료한 결론이었습니다. 훌쩎이는 나를 좁은 마루에 버려두고 아버지는 담배연기 가득한 방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나는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종아리를 걷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어요. 늦저녁 황혼이 마루로 가만히 스며들더군요. 황혼은 매 맞은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맞은 자리가 발갛게 젖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걸 위로해주는 게 황혼의 임무라는 듯이 말입니다. 


272

아아, 정말이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요. 나는…… 나는 …… 내입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 내 입을 말입니다. '나는 거짓말쟁이다'라고 선언한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거짓말쟁이다'라니. 참 이상한 말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거짓말쟁이라면, 그는 진실을 말한 것이므로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됩니다. 그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 거짓말쟁이라고 거짓말을 한 셈이 됩니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쟁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더 이상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없고 거짓말쟁이가 안 될 수도 없는 이상한 상황에……



안보윤 · 나선의 방향

325

남자의 부모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다. 남자의 목소리 역시 그들과 함께 사라졌으며, 목에 사선으로 새겨졌던 굵은 칼집은 새로 돋은 살과 주름 사이로 흐려져 한때 그가 소유했던 말의 억양과 리듬의 기억을 품은 채 사라졌다. 열 살 아래 남동생이 사라진 건 삼 년 전이었다. 하얗고 넓은 이마와 상반되게 억센 머리칼을 가졌던 딸은 다섯 시간 전에 사라졌다. 이제 마지막, 마리암과 그들의 집이 사라진 지점에 이르러서야 남자는 자신의 불행과 오롯이 마주했다. 어쩌자고 이렇게 불행한 삶을 끈질기게 이어온 걸까. 주저앉은 남자의 손바닥에 모래알이 닿았따. 가슬가슬한 모래알이 뜻밖에 따뜻해서, 남자는 뺨을 바닥에 대고 흐느꼈다. 이왕 사라져버릴 거라면 이보다 더 끔찍해야 했다. 더 잔혹한 장면으로 의심할 겨를 없이 사라졌어야 했다. 집이 있던 자리에 증기가 솟구치는 거대한 구멍이라도 뚫려 있었다면 이렇게 무기력해지진 안았을 거라고, 들판에 엎드린 남자는 끅끅대며 사라진 것들의 말끔함을 원망했다. 


345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을 마리암에게 어떻게 전해야 한단 말인가. 남자는 조개껍질처럼 반들거리던 딸의 손톱에 집요하게 들러붙는 죽음의 색을 문질러 지우며 자신들이 낙원이라 생각했던 그곳이 일종의 유배지였음을 깨딸았다. 그들이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오해할 틈이 없었을 뿐임을, 세상을 유유히 살아가고 있던게 아니라 그것과 마주칠 순간을 필사적으로 유예하고 있었을 뿐임을. 남자에게 언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간혹 마리암이 남자에게 보내던 아득한 시선은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체념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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