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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우연이 갖는 운명적 요소를 과장하여 필연으로 바꾸고자 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 류동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필사/책

by Kate.J 2014. 4. 14. 20:36

본문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류동민 

위즈덤하우스 



37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추구하던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을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관계의 총체 중에서 어느 한 측면을 잃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면 그 사랑과 관련된 '나'도 잃어버리는 것이고, 친한 친구와 다툼 끝에 헤어지면 그 우정과 관련된 '나'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연인이나 친구를 잃음으로써 사랑이나 우정을 잃는 것이지만, 결국 잃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됩니다. 

사업상의 목표를 추구하던 이가 실패하게 되면, 심지어는 그 목표를 다 이루고 난 뒤라도 하더라도 이미 모든 것을 이루었따는 허탈감 때문에 그 목표와 관련된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는 사랑에 실패하여 자살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젊은 베르테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절망의 영역과 수준이 다를 뿐, 일상적으로 베르테르의 좌절을 반복해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6

레고 조립에 능숙한 피실험자를 불러다 놓고 어려운 모형을 만들도록 주문합니다. 일정 시간 안에 조립을 마치면 상금을 줍니다. 예를 들어 10분 안에 우주정거장을 조립하면 만 원쯤을 주는 것이지요. 조립을 완성하고 난 후에 다시 도전해 조립을 완성하면 상금을 올려주기까지 합니다. 이만 원쯤이라고 해 둘까요? 그러고는 똑같은 우주정거장 모형을 다시 조립하겠느냐고 물어보면 신이 난 피실험자는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험자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피실험자가 힘들게 조립한 모형이 완성되자마자 부숴 버리는 것이지요. 피실험자의 마음은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두번쨰로 완성된 모혀 역시 무참히 부서집니다. 그러고는 한 번 더 상금을 올린 뒤, 세 번째로 조립하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피실험자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많은 수의 피실험자들이 곧 흥미를 일고 조립을 중단하겠다고 합니다. 

이 실험이 시사하는 것은 사람은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 못지않게, 노동의 과정 자체에도 관심을 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일의 순서와 흐름을 계획하고 그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때, 노동자는 성취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군가 시키는 일만을 되풀이할 때 노동은 소외될 것입니다. 


78

우리는 흔히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우연이 갖는 운명적 요소를 과장하여 필연으로 바꾸고자 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라는 소설에서 이를 잘 분석합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것을 계기로 서로 사귀게 됩니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동안 약간만 어물거리다가 그 다음 항공편을 탔더라도, 즉 우연히 특정시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더라면, 설사 탔다 하더라도 그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았더라면, 두 남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때 사랑에 성공한 두 남녀는 그들의 만남은 이미 예정된 운명 같은 것이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95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인 힘이 전복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론도 대중을 사로자븐 순간 물질적인 힘이 된다. 또한 이론은 사람에 대해 증명되지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이론은 근본적인 것이 되면 곧바로 사람에 대한 것임이 증명된다. 근본적이라는 것은 사태를 그 뿌리로부터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근본적인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인용문에서 '비판'이 이론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무기'는 현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그저 이론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물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대상은 비판만으로는 극복되지 않으며 오직 물질적인 힘에 의해서만 뒤엎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론이 대중을 설득하는 데 성공할 때, 그것은 어느 순간 엄청난 물질적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이론은 오직 근본적일 때에만 가능합니다. 근본적이라는 말의 원래 독일어 표현은 radikal-영어표현도 마찬가지로 radical- 입니다. 흔히 어떤 사상이나 사람이 '래디컬하다'는 표현은 그 사상, 또는 사람이 급진적-진보적이라는 말보다 좀 더 강한 표현입니다-이라는 뜻이 되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결국 급진적인 이론이란, 사태를 그 뿌리에서부터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가리킵니다. 즉 근본적인 이론은 사람에 대해 그 진리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사로잡게 됩니다. 사람들을 사로잡은 이론은 이제 엄청난 물질적인 힘으로 작용함으로써 실제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 어떤 필연적인 법칙, 그러므로 반드시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경로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은 세계의 바깥에만 존재하며, 세계로부터 벗어나 그것에 관여하지 않는다"라는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의 구절은, 그러므로 신이 이 세상을 일정하게 예정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종교적 믿음을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 즉 대중이 어떤 '비판의 무기'를 갖추게 되면, 그에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다름아닌 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105

오랫동안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노출되어 식민지 지배까지 겪었던 한국사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항적 민족주의와 공격적 민족주의, 국수주의, 공동체적 심성과 애국심, 낮선 이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등이 마구 뒤섞여 혼동하는 상태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게 뒤섞인 집단적 심성은 우연적으로 작동하는 계기에 따라 때로는 사회발전을 위한 긍정적 에너지로 분출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파멸적인 공격성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인류평화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민족 자결권이나 자부심의 관점에서 핵무장을 이해하거나, 자본의 논리가 민족주의의 옷을 걸침으로써 공동체적 논리로 위장하거나 하는 일들이 쉽게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념적으로는 정반대인 것으로 보이는 남한의 극우세력과 북한이 독자적으로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똑같은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61

그러므로 경쟁 시스템에 놓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경쟁이란 다른 사람의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입니다. '너'의 기대, 나아가 '사회'의 기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 이것은 결국 '나'를 소외시킬 수 있습니다. 경쟁 시스템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므로, 결국 그것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전체의 소외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경쟁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178

화폐는 원래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기(represent ; 표현 또는 재현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상품은 그것과 교환됨으로써만 가치가 있음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모든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심한 경제위기, 이른바 공황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순수한 돈(금본위제라면 금)을 찾아 해매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결혼이나 성교가 이제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 모든 사랑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릅니다. 말은 어떤가요? 생각과 느낌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언어는 이제 모든 생강이나 느낌이 그것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말의 길이 끊어지는 상태, 그것은 이미 '나'의 사고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190

사회는 법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법적 허구이다. 반대로 법이 사회에 기반해야 하며, 법은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물질적 생산 양식에서 발생하는 사회의 공동이익과 요구를 표현해야만 한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나폴레옹법전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만들지 않았다. 도리어 18세기 출현하여 19세기에 한층 발전한 부르주아 사회는 단지 이 법전 속에서 자신의 법적 표현을 발견할 뿐이다. 이 법전이 사회적 상황에 맞지 않게 되자마자, 이것은 그저 종이뭉치가 될 뿐이다. 


204

그러므로 물신의 대상을 가진 자는 권력을 부여받게 됩니다. 오랫동안 구애에 매달리던 남성이 여성의 사랑을 얻어 결혼하고 나면, 이제는 결혼이라는 물신을 갖게 된 남성이 여성에 비해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됩니다. 물론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사회, 이혼을 했을 때 실질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는 쪽이 여성인 사회에서 더 그렇겠지요. 바다 속의 용왕님이 두렵고 경배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언제 풍랑을 일게 해서 배를 침몰시킬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제대로 된 종교의 신은 구원에 대한 약속응ㄹ 명확하게 해 주지 않습니다.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시에 구원하거나 심판할 것이라는 명확한 소통을 하는 신은 오히려 두려움과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단기간에 신자들을 늘려서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이른바 사이비종교만이 그와 같은 약속을 하는 법이지요. 

다시금 권력을 소유자가 신격화되고 정확하게는 물신이 되면, 그 앞에 엎드리는 이들은 현실의 불확실성과 미래의 불투명성 때문에 생겨나는 고통을 권력의 소유자에게 맡겨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권력에 대한 복종이 그저 환상이라고 깨우쳐 주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그에 기초하여 극복을 도모할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그러므로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모든 물신과 환상에 대한 비판입니다. 동시에 그것들을 낳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60

인간을 인간이라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사랑하고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동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네가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너는 예술적인 소양을 쌓은 인간이어야 한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너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너의 모든 관계는-너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현실적, 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네가 사랑을 알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너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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