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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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비행에 집착하니?"
승민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내 눈을 찾으려고 애쓰는 기색이었다. 시선이 모자챙 주변을 더듬고 있었다.
"날고 있는 동안 나는 온전히 나야. 어쩌다 태어난 누구누구의 혼외자도 아니고, 불의 충동에 시달리는 미치광이도 아닌, 그냥 나.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
불쑥 불편한 마음이 앞에 나섰다. 벼랑 끝에 몰린 주제에 존재 운운하는 허풍쟁이가 아니꼬워서. 허풍쟁이를 아니꼬워하는 내가 초라해서.
"난 잘 모르겠다. 너로 존재하는 순간이 남은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건지."
"넌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는데? 삶은? 죽음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아끼라는 충고 한번 했다고 해서 인류가 수천 년을 고민해온 거창한 두통거리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다니. 그것도 한꺼번에 세 가지나.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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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옛날, 내가 한때 그쪽에 살았을 때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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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민은 산책을 하러 나온 게 아니엇다. 귀환이 보장된 길도 아니었다. 귀환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마지막 비행에 나선 길이었다. 그런 인간이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게 정상일까,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 게 정상일까. 첫 ECT를 받던 날이 생각났다. 그땐 승민의 시시껄렁한 농담이 안쓰러웠다.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는 허세인 줄 알았으니까. 승민이 나무에 오줌을 갈기는 순간에 확인한 것도 허세였다. 더불어 그걸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설령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승민이 안다 해도. 그것이 두려움에 침몰당하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안간힘에 대한 예의였따. 곁으로 가서 나도 통행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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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 어딘가에서 마개 하나가 뽑혔다. 그곳으로 체온이 '쏴' 하고 빠져나갔다. 식어간느 가슴 밑에선 새들이 파닥거렸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새였다. 저 언덕 아래에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세상이라는 두려움. 수없이 겪어왔듯, 기웃거리고 배회하다가 회복할 길 없는 치명상을 입고 되돌아오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결국 아버지가 옳았다고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눈을 감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승민의 시계를 움켜쥐었다. 숨을 멈추고 새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