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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 고령화 가족, 천명관.

필사/책

by Kate.J 2014. 2. 24.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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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가족 

천명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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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서 우리 가족은 극장을 배경으로 모두들 활짝 웃고 있었다. 시댁 식구들과 마주치기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실패를 예감했는디, 아내는...... (다시금 얘기하지만 아내에 대해선 정말이지, 입도 벙긋하고 싶지 않다) 그날 극장에 오지 않았다. 그래도 식구들은 모두 즐거웠다. 나 또한 미연이 맞춰준 이태리제 양보글 입고 가족에게 둘러싸여 쑥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한 편의 훈훈한 가족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 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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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사랑했던 걸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약속도 기대도 없는 쿨한 사이였을 뿐이다. 열정이 없으니 상처도 남지 않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가 캐나다로 떠나고 난 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편이 휑해지는 걸 느끼곤 했다. 그런 상실감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그녀의 빈자리는 아내가 떠났을 때보다 더 크고 깊었다. 그것을 사랑이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믿기론, 사랑이란 여자의 입장에선 '능력 있는 남자에게 빌붙어서 평생 공짜로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 양육해줄 젋고 싱싱한 자궁에 대한 열망'일 뿐이었다. 우울한 얘기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사랑 이야기는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젊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사랑하곤 애초에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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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은 내 속옷을 사고 잠옷과 실내화를 샀다. 우리는 원룸오피스텔에서 함께 밥을 해먹고 산책을 하고 침대에 느긋하게 기대 앉아 옛날 영화를 봤다. 대부분 <미치광이 피에로>나 <피아니스트를 쏴라>와 같은 누벨바그 시대의 영화들이었다. 그것은 대학시절 프랑스 문화원을 함께 드나들면서 보았던 영화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구문화에 대한 선망과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어 가요 대신 팝송을 듣고, 방화 대신 외화를 보고, 한국소설 대신 번역소설을 읽은 세대였다. 학교에서 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한때 열심히 '독재타도'를 외쳤으나 우리가 이룬 것이 무언인지는 알 수 없었따. 한때는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에 들뜨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다시 제자리인 것 같기도 했다. 때론 아무런 지도도 없이 전속력으로 어딘가를 향해 달리다 막다른 벽에 부딪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세대는 어느덧 옛날 영화나 보며 과거를 추억하는 중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내 삶 전체가 뿌리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신기루를 쫓아 살아온 원숭이짓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실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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