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장에도 등급이 있다. 좀 좋은 문장을 읽으면 뭔가를 도둑맞은 것 같아 허탈해진다... 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뿌연 안갯속이던 무언가가 돌연 선명해진다... 더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멍..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문학동네
47
그의 시들도 결국은 같은 말을 하고 있따. 지금 내가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상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에 충분히 지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홀연히 떠나면 그것은 그저 무책임일 뿐이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이러구러 봄날이 다 가는 동안 우리는 끝내 이 도시를 떠나지 못했구나. 임은 삐쳐 있고 꽃들은 진다.
136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노이즈로 얼룩진 시들이 오히려 순수해 보이고, 멀끔하고 예쁘장한 시들이 어딘가 엉큼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 전도 효과가 이 시인의 주요의도 중 하나였을까. 실상 우리의 연애라는 게 발라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유치한 자존심, 집요한 욕망, '찌질한' 응석 따위의 노이즈들이야말로 연애의 진짜 사운드인거니까.
시에 노이즈를 도입하는 일 그 자체가 놀랍도록 새롭다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사운드 혁신에 가장 둔감한 장르 중 하나인 연애시의 한복판에서 노이즈를 만들어내고, 또 그 노이즈를 서정적인 층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물론 이 시집에서는 그 결과가 아슬아슬한 시들도 있다. 그런 시들이 만만해 보여서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쓴다'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 같다. 근데 써보면 안다. 나도 쓰겠다 싶은 그런 시, 막상 써보면 잘 안 써진다. 화음에 정통한 자만이 소음으로도 시를 쓸 수 있는 법이다.
163
이 사태는 이제 정치학이 아니라 정신병리학의 소관처럼 보인다. 이 정권은 환자다. 그들에게는 초자아(Super Ego)가 없는가. 민주화 이후 그토록 더디게 우리 내면에 겨우 자리잡은, '이런 일은 이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는, 그 초자아가 그들에게는 없는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죄의식도 없는 것이다. 이드(Id)만 있는 권력이라니. 꿈이 곧 현실이고 소망이 곧 실천인, 그런 권력이라니. 지난 1월 20일 우리가 목격한 것은 이드가 다스리는 나라의 진상이다.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죄하는 사람은 없다. 본래 이드는 사죄하지 않는다.
(중략) 그렇다 해도 새해 벽두에 가장 참혹하고 치명적인 시는 시집이 아니라 용산에 있었다. 그래서 시가 아니지만 시이기도 한 문장들을 읽는다.
"용산의 아침 작전은 서둘러 무리했고, 소방차 한 대 없이 무대비였습니다. 시너에 대한 정보 준비도 없어 무지하고, 좁은 데 병력을 밀어넣어 무모했습니다. 용산에서 벌어진 컨테이너형 트로이 목마 기습 작전은 처음부더 끝까지 졸속 그 자체였습니다. 법과 질서라는 목표에만 쫓긴 나머지 실행 프로그램이 없었고, 특히 철거민이건 경찰이건 사람이라는 요소가 송두리째 빠져 있었습니다" (문화방송 <뉴스데스크>, 2009년 1월 20일, 클로징 멘트)
신경민 앵커가 직접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멘트를 옮겨 적었다. 나는 이 문장들에서 시를 봤다. 맨 앞의 두 문장은 거의 비문(非文)이라고 해도 될 만큼 문법적으로 위태롭다. 그러나 이 위태로움 속에는 어떤 에너지가 있어서 흠을 잡을 수가 없다. 이 두 문장을 실어 나르는 팽팽한 대구법에서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한 안간힘 같은게 느껴진다. "말을 한다는 것은 총을 쏜다는 것이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한 적이 있거니와, '무리', '무대비', '무지', '무모'로 이어지는 네 단어는 네 발의 총성처럼 들린다. '트로이 목마 기습 작전'이라는 비유 역시 시적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요소"라는 말은 '과격 시위', '진상 조사', '책임자 처벌' 등등의 삭막한 단어들을 단숨에 뜨겁게 관통해 버린다.
231
대게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은 피해자의 얼굴이 아니라 가해자의 얼굴이다. 용산에서 여섯 명이 죽었지만 그들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대다수가 강호순의 얼굴은 공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굴 공개로 얻게 되는 '공익'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그가 향후 지속적으로 공중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공인이 아니기 때문에 '알 권리' 운운도 설들력이 없다. 징벌의 차원에서 얼굴을 공개하자는 논리는 법치주의에 위배될 뿐 아니라 살인자의 가족에게는 연좌제의 굴레가 될 수 있어 위험핟. 유사 범죄 예방 운운은 추단과 바람일 뿐이어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성문법을 훼손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의 인권이 문제가 된다면 살인자의 얼굴을 유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할 수 있겠지만 본래 인권이란 서로 주고 뺏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수호되어야 하는 것이어서 저 논리는 감상적이다. 예외를 허용하면 원칙은 파괴된다. 살인자가 아니라 인권 그 자체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연쇄살인자의 얼굴은 전쟁터가 되었고 그 전쟁에서 우리는 졌다.
240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 포럼'의 새 역사 교과서 심포지엄이 파행으로 치달았다. 역시 민주주의는 위대하다. 이런 교과거까지 나올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닌가. 민주화와 산업화를 양대 축으로 설정하고 후자를 위해서는 전자가 얼마간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결과주의를 은영중 도모하는 저들의 논리는 경악스럽다. 설사 유신 시절에 한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해도 그 부국강병의 이면에서 억울한 죽음의 피비린내가 조금이라도 난다면 우리는 조국을 향해 침을 뱉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어떠한 종류의 의견 표명도 기꺼이 포용하지만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협하는 발언들까지 껴안을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한계를 시험하지 마라. 문제는 좌편향이냐 우편향이냐가 아니라 상식이냐 몰상식이냐다.
(중략)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받게 된다면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숱하게 인용되고 있는 볼테르의 말이다. 이 말을 다시 인용하는 우리의 심정은 참담하다. 당연한 상식이 되어야 할 이 말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도달해야 할 미래인 것인가. 한때 민주주의는 '교과서 포럼'이 산업화의 기수라 찬양하는 그 대통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피흘리며 죽어간 민중들 덕분에 민주주의는 살아났으나, 오늘날 그것은 여전히 얻어맞고 있다.
245
본래 한국의 아버지들은 이렇지 않았다. 자식이 싸우고 들어오면 못난 자식을 꾸짖거나 당신 자신을 자책하셨다. 싸움을 교육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남의 집 자식 불러다 두들겨 패면 그 순간 교육은 물 건너간다. 스스로 문제를 직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교육(敎育)이라면, 직접 해결을 대신해주는 것은 사육(飼育)이다.
그러나 자식의 잘못을 아비의 잘못으로 돌리는 유교 문화권의 전통이 늘 아릅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방법'이어야 한다. 자식이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정도의 효과만을 발휘할 때 그 방법은 가치가 있다. 문제를 일으킨 개인이 스스로 책임을 떠맡을 때 역설적이게도 그 개인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반대로 아비가 책임을 질 때 자신의 개인성은 소멸된다. 이를 테면 버지니아 공대의 비극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잘못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전 인류의 잘못이다.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부모의 잘못도 아니고 한국인 모두의 잘못도 아니다. 속죄를 대신하려 할 때 또 다시 고질적인 집단주의가 차우걸한다. 주미 대사가 32일간의 금식기도를 제안한 것은 저 해괴한 신드롬의 절정이었다.
게다가 이는 사실상 비굴한 아버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그 대상이 미국이 아니었다면? 일각의 지적대로, 한국에서 죽어간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우리는 단 한끼도 금식해본 적이 없다. 한낱 술집 종업원이기에 마음껏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 다름 아니라 미국이 그 대상이기 때문에 노심초사 무릎을 꿇는 아버지, 이 두아머지는 같은 아버지다. 이 아버지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젠가 아버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난감하다.
247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박종철이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들은 이십대를 갓 넘긴 청년들이었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최근 이뤄진 한 설문 조사에서 서울 지역 4개 대학 학생의 절반 이상은 '6월 항쟁'을 모른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다가올 대선에서 독재 정권의 역사 의식을 잇는 야당 유력 후보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박종철과 이한열의 이름을 모르는 채로 이루어진 선택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그것은 정치적 무뇌아 혹은 윤리적 백치의 선택이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잊을 권리가 없다.
267
본래 이 세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었던가? 있다면 자기 직업에 충실할 뿐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공적 책무에도 성실하나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 가지 공통점이 추가됐다. 공히 현 정권의 미움을 받아 이미 불이익을 받았거나 앞으로 받게 될 상황이라는 것.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했지만 그렇다고 급진적인 반정부 인사씩이나 되는 이들은 아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따위의 개념들은 이들 앞에서 어색해 보인다. 이 세사람을 움직인 것은 그저 상식(常識)과 상정(常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지경이다. 우리의 정부가 몰상식하고 몰인정할 뿐 아니라 혐오스러울 만큼 쩨쩨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291
김소연은 마음에 대해서 말한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ㅇ낳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보았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해> 좀 얄밉다. 반박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반박하기 어렵게 써놓았으니까. '설렘'을 한 줄로 설명한 대목은 그냥 시다. "뼈와 뼈 사이에 내리는 첫눈", '애틋함'은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릴까봐 안타까워하는 것"이고 '참혹'은 "뼈와 뼈 사이에 내린 포궁로 인한 참사"란다.
292
두 사람의 공통점 하나를 말하겠다. 좋은 문장에도 등급이 있다. 좀 좋은 문장을 읽으면 뭔가를 도둑맞은 것 같아 허탈해진다. '아이쿠, 내가 하려던 말이 이거였는데.' 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뿌연 안갯속이던 무언가가 돌연 선명해진다. '세상을 보는 창 하나가 새로 열린 것 같아요.' 더 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멍해진다. 그런 문장을 읽고 나면 동일한 대상을 달리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그 문장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제 더이상 할 말이 없어요.' 이런 문장, 두사람의 책에 매우 많다.
339
본능, 충동, 욕망, 사랑. 언뜻 비슷해 보이는 개념들입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개념들끼리는 서로 겹치는 데가 있어 보입니다. 본능이나 충동이나, 충동이나 욕망이나, 욕망이나 사랑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러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을 비교해보면 선뜻 그게 그거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본능과 사랑은 썩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네가지를 일종의 스펙트럼으로 간주해보면 어떨까요. 빨강에서 보라까지, 본능에서 사랑까지. 인간이라는 우주 안에는 저 네가지 종류의 정념이 일종의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러 헷갈립니다.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 정념은 본능일까, 충동일까, 욕망이까, 사랑일까. 헷갈려서 불안하고, 불안해서 실수하고, 실수해서 후회합니다. 이 네가지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사는 일이 한결 편해질 텐데요.
(중략)
앞에서 우리는 네 종류의 정념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면 인생의 불행이 줄어들 것이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테레즈와 로랑이야마롤 그 정념의 스펙트럼에서 길을 일고 만 사람들 입니다. 그들이 저 정념들의 논리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 까요? 본능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늘 이렇게 해왔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한다". 욕망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이것이 금지돼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할 것이다." 충동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테레즈와 로랑은 금지된 관계였기 때문에 그토록 뜨거운 욕망을 가질 수 있었고, 금기가 사라진 순간 욕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가학, 피학 충동 뿐입니다. 사랑이라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욕망이었고,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욕망의 버팀목이었으며, 버팀목이 사라진 자리에는 맹목적인 충동만이 남았습니다.
353
시를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다고 투덜거리는 것으로 첫 강의의 말문을 열였다.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표현 요구일 텐데, 그것은 많은 경우 자기애나 자기만족으로 귀결되고 만다고, 그러나 예술은 그런것이 아니라고 했다. 어설픈 창작자들 보다는 고급 수용자들이 더 필요한 사회라고도 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시를 공부한 이의 엘리티즘이 얼마간 개입했을 것이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허다한 시 창작 교실에 대한 근거 없는 분신과 냉소가 나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봤다. 나는 후회했다. 개강하지 전에 이 영화를 먼저 보았더라면 첫 수업을 다르게 시작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