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책

나는 그날의 나들이에 관해서는 할말이 많다고 생각해왔다.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이다. - 황정은,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Kate.J 2014. 5. 8. 17:24

2014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여섯명

문학동네 



상류엔 맹금류, 황정은 


33

나는 그날의 나들이에 관해서는 할말이 많다고 생각해왔따.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이다. 


39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나'라고 하지 않으려니 이토록 비겁해진다. 그러나 막상 '나'라고 하려니 "좀 사나운 심정"이 된다. 저 또한 지금껏 궁금해하듯, 그날 그들을 흔쾌히 따라가 신나게 돗자리를 깔았따 한들 지금 '나'와 그들은 함께일까. 모를 일이다. 아니 "무슨 일을 계기로 헤어지게 되었는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폐를 들어낸 아버지의 가슴처럼 아물 만하면 다시 헤집기를 반복하는 가운데에 돋아난 새살들로 울퉁붕퉁 채워진 것이 제희네의 삶일진대, 그 속을 '나' 아닌 누군들 다 알까. 삶? 예컨대 '나'가 전해들어 조금 알고 있는 제희네 어머니의 삶, "그 사이사이에, 내가 모르고 제희도 모르고 심지어는 그녀 자신조차 잘 모르는 일들이 그녀에게 일어났을 것이다". 사랑? 그 사랑 고작 "매화처럼 한철이라 한철"이란다. 이렇듯 그날의 진실에 대해서라면, 그들의 진실에 대해서라면 '나'도 우리도 모르는 게 더 많다. 

그러니 "무뚝뚝해 보이고 다소간 지쳤지만, 상냥한 사람들"에게 버려졌다는 생각에 이따금 외로워하며, 돌이킨들 끝내 모를 그날 그곳에 묶여 있는 '나'를 비난할 이 누구인가. 그후로도 너무 오래 '나'는 '나'를 당혹스럽고 슬프게 했다. 무화과를 건네던 제희네 어머니는 그리될지를 언뜻 예감했던가보다.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아닌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그런 삶도 있고, 활짝 한번 피지 못한 꽃들이 모여 그대로 열매가 되는 그런삶도 있다. 불그스름하게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수도 없이 많은 무화과 꽃들이 곧 제희네 삶, 그 모든 꽃 시절의 순간들이거늘, 저들도 미처 다 모르는 그 속을 '나'라고 도저희 알 수는 없으리라. 




창 너머 겨울, 최은미 


165 

사람이라면 다 그런가봐요. 생각보다 적응이 빠르죠.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였는지 더웠는지 추웠는지 악취가 났는지 향기가 번졌는지 금세 잊어버리곤 해요. 그러다 무심결에 뱉은 입김이 창문에라도 가 닿으면, 닿아서 성에 같은 것이 번지면, 그제야 나한테 온기가 있었구나, 바깥세상은 온통 차갑구나,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도 있는 거예요. 저야 지금 당신이 어떤 얼굴로 있을지, 삐딱하거나 꼿꼿하게 앉아 있을지, 짐작도 하기 어렵네요. 다만 조금 전 하나의 소설을 같이 통과한 끝에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함께 어떤 성에 같은 것을 느꼈다면 당신과 제가 마찬가지라 여겨볼까해요. 



이상한 정열, 기준영 


195 

마리야. 

무헌이 그런 애칭으로 시작해 겨우 두 줄 적다 만 편지는 주어와 술어가 어긋난 채 마침표가 아닌 쉼표에서 멈추었고, 아직 어디에 가 닿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끔찍하게 텅 빈 채로 소란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말희의 집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실제로 그곳으로 달려가보기도 했다. 상처 입고 굶주리면서도 옛집을 찾아가는 그 어떤 혈통 좋은 진돗개들처럼 탄도 그를 따라 성실하게 뛰고 또 뛰었다. 그는 오랜 시간 서성이는 그 집의 불이 켜졌다 꺼졌다, 창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았따.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던 어느 저녁 무렵에는 그 집 앞을 오가던 이웃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턱없이 더 집요해질 때도 있었다. 보라색 꾸러미를 들고 그와 한 택시에 올라탔던 소년, 가전 제품과 개에 정통한 사내, 다리에 흉이 진 채로 나타난 옛사랑이 살고 있는 저편, 아니 그가 부재한 자리에서 무언가를 통과해왔고 이제 여기 당도해서 서걱거리고 부딪치고 신음하고 비틀렸다가, 다시 환한 웃음이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밝아오는 아침해를 함께 맞는 것들에. 모든 것을 친애하고 싶은 그의 마음은 한순간 너무 뜨거워져 정염과 헷갈렸다. 그는 때로 열이 오르고 야원 채로 갈팡질팡했다. 생이 덧없다는 말은 무용했다. 


202

그렇게 말희를 향해 뻗어나가던 무헌의 마음은 오히려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자기 생이 오래전에 뭔가를 건너뛰었음을, 건너뛴 그 부분에서 뭔가가 다시 시작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비추어낸다. 이 때 그가 건너뛰었다고 느낀 것은 아마 말희, 혹은 말희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망므의 요동침들일 것이다. 삶에서 결정적이었어야 하는 것은 바깥의 소리들로 장악되어 있는 일상에 있는 것이 아님을, 그렇게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는 삶 속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쳐버렸으며, 또 그것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너무 오래 지나와버렸음을 자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그의 사정과 무관하게, 시간은 그것을 잃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함, 그의 바깥에서 언제나처럼 비슷한 모습으로 "다시 평범한 시절"이 흐르도록 만든다. 이렇듯 시간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색하게 흐르지만, 존재는 바로 그 시간 속에서만 존재일 수 있다. 그러니 무헌은 그 평범한 시절 속에서, 존재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타자성,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비롯하는 실존적 한계와 생의 허무를 한꺼번에 절감한다. 뒤늦은 자각과 상실 속에서, 무헌의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향해 고여 있으니, 그 존재 내부와 바깥의 시차가 현재를 "끔찍하게 텅 빈 채로 소란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무헌이 이렇게 뛰어다니게 된 것은 


203

처음 무헌이 뛰었던 것이 닿고자 하는 곳을 향하던 마음의 박동에 충실해서였다면, 지금의 것은 가까스로 되찾은 내면의 소리가 말희에게로 닿는 것에는 이미 의미가 없음을, 그렇기에 제 마음의 통로가 막힌 것이나 다름없음을 아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것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도 없다는 데서 시작되는 것, 도달할 곳을 잃어버렸기에 모든 것에게로 뻗어나가는 '이상한 정열'이다. 이쯤에서 이 소설의 첫 장면과 무헌이 처음 뛰던 순간,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 간극을 체감하면서, 우리는 삶이란 서늘하게도 문든 이같은 간극과 마주하는 것이며, 그럴 때라면 우리 역시 무헌처럼 쓸모없는 열정을 쏟아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 무헌의 시간을 겪은 뒤 우리의 마음이 각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도중에 이내 슬퍼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잃어버린 것들이 있어서이다. 예전처럼 '마리야'라고 부르다 쉼표 뒤에서 허무하게 멈추어버린 편지처럼, 어딘가에 닿지 못하고 그쳐버린 것들을 잊은 채 바깥의 소리에 묻혀 오늘을 지나보내서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살아 있음은 연애의 시간뿐 아니라 그 이상한 열정, 즉 무정한 시간이 겪게 하는 생의 덧없음의 한가운데에서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우리 내부의 요동침으로 인해서도 증명된다. 그렇게 <이상한 정열>은 무헌이 각기 다른 온도로 뛰게 되는 두 개의 결정적 장면을 통해 삶을 정직하게 증명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은 뒤 남은 것은 이 이상한 정열 역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지나면, 다시 평범한 시절에 속하게 되리라는 예감이었다. 내면의 소리가 열을 내며 끓다가 시간 속에서 식어버리는 과정, 그것이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어렴풋한 예감 때무에, "생이 덧없다는 말은 무용했다"라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도 나는 오래 읽어야만 했다. 



산책, 손보미 


236

사건의 진실이 하나일 때에도 사람의 진실은 여럿일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얽혀 만들어낸 관계에 오해와 의심과 해명이 끼어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각자의 진실들이 자기를 주장하고 나설 때 관계의 결속력은 급격히 약해지고, 그 관계 안에서 당연하게 누려왔던 안정감은 순식간에 불안과 두려움으로 바뀐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251

눈을 반짝이며 웃는 엄마와 말이 많은 할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이런 사람들을 바깥에서 만났다면 나는 주저 않고 좋은 어른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할아버지는 늘 무기력했고 사람을 사귀는 일에 서툴렀다. 나는 엄마와 할아버지가 작동하지 않아 해마다 먼지가 쌓이고 색이 바래가는 괘종시계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변화할 의지도,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사람들이라고. 


270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영화 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좇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따.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영화에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건 착각이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영화판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야기는 내 안에서부터 흐르지 않았고 그래서 작위적이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기에 억지로 썼다.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