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이후 나는 스스로가 무신론자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다. 인간의 삶을 관장하고 다스리는 절대자의 존재를 부러 부인한건 아니었지만, 특별히 긍정할 만한 까닭도 없었다. 그렇게 오만했..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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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호랑이 선생님」을 시청하던 시절에는 곧잘 상상하곤 했었다. 서기 2000년이 오면 버스 대신 우주선을 타게 되겠지, 밥상 위에는 완두콩밥과 된장찌개 대신 알록달록 알약들이 올라올 거야. 그렇다면 나는 자장면 맛 캡슐과 전기구이통닭 맛 캡슐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다. 어떤 미래도 결국 무심히 지나가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나이였다. 그로부터 이십 년 뒤, 나는 냉장고 한구석에서 유효기간이 지난 계란을 발견하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떠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계란을 깨뜨리는 순간 그 안에서 반쯤 부화된 채 웅크리고 있던 병아리 한 마리가 튀어 나온다면, 그 연약한 어린 짐승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친다면, 어쨌거나, 119에 신고하는 수 밖에, 정말로 나는 다른 방법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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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치과대학에 다니는 남자는 신붓감을 찾으러 귀국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이 손상된 치아의 복원이라고 소개했따. 길을 걷다 말고 그는 십 층 높이의 건물을 가리켰다. 하루에 환자 세 명만 받으면 저런 빌딩은 금방 올릴 수 있어요. 그런 말을 진심을 담아 하는 사람을, 텔레비전 드라마 안에서가 아니라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나의 경멸을 산 동시에 엄마를 솔깃하게 했다. 엄마 미쳤어?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어떻게 살라는 거야? 너 계속 영어학원 다녔잖아. 기껏 비싼 돈 처들여 학원 보내줬더니 말이 왜 안 통해? 아무튼 안 돼. 난 절대 다른 나라에서는 못 살아. 왜? 왜냐면 나는 고급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니까. 그제야 내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기 위해서 영어 공부를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3월이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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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봤으면 대답해주었겠지만, R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내 기준에서는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R은 그걸 섭섭하게 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마음과 마음 사이 알맞은 거리를 측정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겐 몹시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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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내 초록색 반투명 모토롤라 삐삐에 안위를 묻는 메시지들이 가득 찼다. 저녁을 짓다 말고 찌개에 넣을 두부를 사러 삼풍백화점 슈퍼마켓에 간 아랫집 아주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도마 위에는 반쯤 썬 대파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며칠 뒤 조간신문에는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이 실렸다. 나는 그것을 읽지 않았다. 옆면에는 한 여성명사가 기고한 특별 칼럼이 있었다. 호화롭기로 소문났던 강남 상품백화점 붕괴사고는 대한민국이 사치와 향락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나는 신문사 독자부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신문사에서는 필자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독자부의 담당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가 거기 한 번 와본 적이나 있대요? 거기 누가 있는지 안대요? 나는 하아하아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전화를 들고 있어 주었던 그 신문사 직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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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부랴 들어선 응급실에서 현우를 보자마자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눈물이었다. 현우는 주사약을 맞은 뒤 잠들었다고 했다. 응급실 의사 말로는, '지켜봐야 알겠으나 아주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누운 새끼의 병상 앞에서 나는 오래 울었다. 사춘기 이후 나는 스스로가 무신론자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다. 인간의 삶을 관장하고 다스리는 절대자의 존재를 부러 부인한 건 아니었지만, 특별히 긍정할 만한 까닭도 없었다. 그렇게 오만했다. 누구인지 모를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면서 나는 어느새 저절로 뇌까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살려주셔서. 그것은 절실한 간구의 기도, 그리고 뜨거운 감사의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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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의 스킨십은 어쩐지 본인의 들끓는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에의의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 이 사람은 적어도 여자를 고무 인형으로 대하는 플에이보이는 아니니 안심이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니까. 연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남자가 여자의 몸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녀의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는 간접적 신호일까. 그녀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여. 상현은 연희에게 이미 명료한 자기 의사를 밝힌 것인지도 모른다. 역겹도록 싱거울 게 분명한 점심 식사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서 연희는 미친 듯이 재다이얼 버튼을 눌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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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가 정해놓은 삶의 규정 속도를 어기지 않는 삶이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이란 생각은 또 얼마나 순진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김영수라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름 뒤에 숨은 사연이 드러나는 순간, 김영수의 평범함이란 살아가기 위한 그의 필사적인 연기였음이 밝혀지고, 그들의 결혼은 결국 파국으로 마무리된다. 김영수라는 평범한 이름 뒤에 숨어 살아온 그는 기실 사회적으로 부재하는 존재였던 것. 작가는 은수가 김영수과 만나는 시점부터 그의 평범함을 반복해서 부각시킴으로써, 평범함 뒤에 숨어 있는 존재의 공허 , 거대한 블랙홀처럼 존재의 개별성을 빨아들이는 제도적 욕망의 텅 빈 내부가 드러나는 순간을 예비한다. 그리하여 소설의 마지막ㅇ서 은수는 "솔직히 나도 가끔씩 내가 '오은수'를 흉내 내며 사는 건 아닐까 궁금해요. 내 이름이 오은수가 맞는지, 내이름과 진짜 나 사이에 뭐가 있는지"라는 물음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