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책

밤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고, 그 밤에 대개 우리는 혼자겠죠. 그런 밤이면 아마 시간이 너무 많아서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거예요. 맞아요. 그래서 청춘은 무거워요. - 김연수, 청춘의 문..

Kate.J 2014. 6. 28. 00:17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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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그보다 더 늙었었어요.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거든요. 10대와 20대, 살아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강했던 청춘 시절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여분의 삶이다, 그런 생각. 이제부터는 인생이 크게 바뀌지는 ㅇ낳고 계속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이다, 뭐 그런 생각. 지금 그때의 제게 돌아가서 뭔가 얘기해준다면, 정신 차리라고 하고 싶네요. 네가 얼마나 어린지 아느냔고, 그러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못돌아가는 거니까요. 그건 누구나 다 거치는 과정 같은 것이겠죠. 지금은 그때처럼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생각 같은 걸 안 해요. 그때 이후로는 계속 그랬어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늙어던 시절이었죠. 

다 똑같은 과정을 거쳐요. 청춘은 반복돼요.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지나고 나면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제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사람이 나아지는 건 너무나 어렵다는 것. 예전에는 많이 배우면 나아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진보하진 않아요. 시간이 지난다고 세상이 진보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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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지금 생각하면 20년 전의 일들은 무슨 전생의 일들처럼 까마득해요. 혼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야 그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떠오를 정도에요. 옛날 종로서적이 있던 곳을 지나가다가, 혹은 김광석의 노래를 듣다가 비로소 생각나는 기억들도 있고요. 그런데 그때 괴롭고 힘들고 고민스러웠던 일들은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물론 뭐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는 기억나지만, 고통이라는 건 실제적인 아픔이지 머릿속 기억이 아니잖아요. 그래서인지 되살아나는 감각들은 모두 좋았던 것들뿐이에요. 감각적으로 우리는 고통에 훨씬 더 쉽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지만, 당시에는 세상 전부인 것처럼 나를 괴롭히던 그 고통은 하루만 지나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죠.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즐긴 것들은 평생을 가니까, 가능하면 그런 일을 더 많이 해야죠. 

(중략)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그 어느 순간부터 이 세상에는 낯선 것보다는 익숙한 것이 더 많아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고 낯선 거리에 가도 어느 쪽으로 움직이면 되는지 대충 감이 옵니다. 태양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어쨌든 세상은 뻔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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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창작 과정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밤낮없이 쓰고 싶은 소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고 해서 멋진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럴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죠. 하지만 계속 생각하다 보면 뜻하지 않는 곳에서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나 일들이 생겨요. 예컨대 <출판저널>에서 기자로 일할 때 『굳빠이, 이상』을 썼는데 그때 갑자기 이상에 관련한 책들을 내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라고요. 당연히 저는 그들을 인터뷰하러 가죠. 그러면 몰랐던 사실들을 그분들이 얘기해줘요.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갑자기 이상에 관련한 책들이 쏟아진 게 아니라 그 생각만 하니까 그제야 그런 책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겠죠. 한 가지 소설만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 시점에서 뭔가가 나올 텐데, 라는 생각으로 기사를 뒤진다거나 국립도서관에서 논문을 검색했을 때 원하는 바로 그 논문이 튀어나오는 경우까지 이르게 되죠. 이렇게 되면 운이나 우연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건 길을 가다가 돈을 줍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에요. 탐지기를 매일 들고 다니다가 돈을 줍는 것에 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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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가 본 것들. 땅에 닿자마자 녹아내릴 운명인데도 서귀포 하늘을 가득 메웠던 1월의 눈, 자기들이 얼마나 착한 눈빛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독일에서 온 연주자들을 바라보던 통영의 여학생들과 연주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등불을 내건듯 어두운 거리를 환하게 밝혀 주던 4월의 벚나무들, 결국 내 머리칼 위에서 부서져 내릴 초록색 그늘을 짙게 드리우던 7월의 북한산의 녹음, 그 어느 때라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손등을 쫙 펼치고 바라보던, 손끝에 남은 몇몇 향기들, 1년 내내 내 마음속에서 일었다가 사라진 한두 개의 소망들......

지금 나를 지도로 그리면, 그 세세한 지명은 그런 이름들로 채워질 것이다. 문학이란 내게 그것들이 과연 어디서 왔으며, 왜 내안에 들어오게 됐는가를 밝히는 일인 듯하다. 실선이 아니라, 내안의 희미한 점선 같은 것들. 내게 소설이란 오랫동안 그 점선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그 점섬을 통해 내 삶의 영토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때로 쓸쓸하고, 때로 행복하다. 하지만 그 언제라도 내게 확신을 주지는 않는다. 나는 한 번도 내 소설을 확신한 적이 없다. 그럴 때, 소설을 쓰는 일은 일종의 체념에 가깝다. 

그러고 보면 그간 나는 나를 확신시킨 것들을 구태여 몸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따.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왼쪽과 오른쪽. 그것들이 머물 곳은 내 몸 안이 아니어도 많지 않겠는가?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에만 관심이 갈 뿐이다. 짐작과는 다른일들,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만이 나의 관심을 끈다. 스무 살 이후로 내게 삶이란 그런 일들만을 모아놓은 상점 같았다. 쇼핑할 엄두는 내지도 못한 채, 기이하고 괴상하고 난처한 물건들 앞에서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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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준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 

(중략)

겸손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셨던 그 문장도 타인의 삶에 대해서 내가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거예요. 쓸 수 있는 문장이 있고, 쓸 수 없는 문장이 있어요. 내가 경험한 것은 쓸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쉽사리 쓰지 못해서 주저하거나 아예 그 부분을 포기하는 걸 볼 때가 있는데, 이럴 때의 문장이 바로 겸손한 문장이죠. 겸손한 문장은 내성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자기가 아는 것들만 말한다는 점 때문이에요. 모르겠다, 타인에 대해서는 쓸 수 없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인식 아래에서 쓰는 문장이 바로 겸손한 문장이죠. 

대표적인 예가 레이먼드 카버예요. 카버는 사람과 사람은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카버의 화자는 타인의 마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요. 내면 묘사가 없어요. 화자도 독자도 작가도 볼 수 있는 것만 글로 써요. 딱 한 번, 「대성당」에서만 제외하고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좋은 문장이에요. 누군가 나를 잘 안다고 말할 때 느끼는 제 거부감도 그런 맥락에 놓여 있는 거죠. 여러 차례 얘기한 전지적 작가 시점에 대한 반감 역시도요. 기본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자가 쓰는 문장이 제게는 좋은 문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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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실패의 경험은 언제나 괴롭기만 한 것입니다.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서 그 과정에 있는 불안과 실패도 좋았다고는 볼 수는 없겠죠. 물론 몇 번 경험하고 나면 그 불쾌한 경험 없니는 소설을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긴 하죠. 그래서 예쩐보다는 덜 괴로워 한다거나 덜 짜증을 부린다거나 해요. 겨우 그 정도지, 좋은 것이니까 이 불안과 실패를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건 불쾌하고 불편한 경험이에요 그러나 말했다시피 지나고 나면 부정적인 경험은 우리 안에 남지 않아요. 캄캄한 어둠이라면, 우리 안에 남는 건 그 캄캄함이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 미미하게 비치던 빛 같은 것이죠. 그게 기억의 속성인 것 같아요. 글쓰기는 기억을 닯았어요.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글로 쓰는 거죠.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망각해요. 이 의도적인 망각이 창작의 원동력이에요. 어쩌면 삶의 원동력일지도 모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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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로니컬하게도, 혹은 잔인하게도 모든 재앙은 개인의 고독까지도 휩쓸고 지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대지진이든, 전쟁이든, 홍수든 참사가 벌어진 뒤에 우리가 직면하는 풍경은 피난민 대피소와 같은 공동의 공간이니까요. 거기에 자신의 방은 없더군요. 개인은 자신의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모두의 앞에 꺼내 놓아야만 합니다. 당연히 그 감정들은 균질화되겠죠. 

그러나 대피소 바깥의 다른 모든 인류에게 그 감정들은 너무나 생소합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저는 TV를 통해 수많은 고통을 목격했습니다. 그 고통은 때로는 CCTV의 녹화된 화상으로, 혹은 녹음된 절규로 전달됐습니다. 감각적으로 볼 때, 시각과 청각이 압도적이었고 코와 입과 살갗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TV가 전달하는 재앙은 저의 고독마저도 휩쓰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잘 가공된, 결국에는 우리를 시청자로 만들고, 관람객으로 만들고, 안심시키는 종류의 그런 재앙이랄까요. 덕분에 저의 고독은 안전합니다. 

그렇게 들어간 저의 방에서 문득 코와 입과 살갗으로 경험하는 대지진에 대해서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불안한 징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의 느낌이라거나, 압도적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의 압력, 혹은 온 존재를 뒤흔드는 갑작스런 오한 같은 것들을 말이죠. TV가 전달하지 못하는 그 감각들에 대해서. 그러면서 고독이란 다시 감각의 부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느끼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제가 느끼지 못한다거나. 예컨대 그게 책갈피에 검지가 베이는 것 정도로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모든 재앙은 개인의 고독까지도 휩쓴다는 말은 틀렸겠군요. 결코 전해줄수 없는 감각적 정보들 앞에서 고독은 늘 상존하는 것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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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아가 된다." 택배 상자를 앞에 놓고 한참 읽었네요. 그건 마치 누군가가 내 마음을 대신 읽어주는 것 같더군요. 독서를 통한 치유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됐어요. C.S 루이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참 신기해요. 독서는 호나서만 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심지어 수천 년 전의 사람과도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188

경공의 그 탄식에 안자晏子가 말했듯이 '역대 영웅 군왕들이 다 잠시 소유하다가 두고 간 땅을 놓고, 자신도 두고 갈 일이 애달파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어질지' 못한 게 분명하리라. 그러니 꽃이 피면 그 한조각 같은 봄이나마 즐기면 되는 일이지, 봄이 짧은 것을 굳이 서러워할 일은 아닌 듯하다. (중략) 그러면서 얼마 전, 누군가 내게 지금도 봄꽃이 피면 가슴이 설레는지 물어온 일이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일은 예전처럼 절박하지 않은 대신에 꽃이 지는 걸 반드시 지켜보게 됐다고나 할까. 



191

어쩌면 지는 꽃을 바라보는 일은 피는 꽃을 한 번 더 바라보는 일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피는 꽃이 좋았던 시절에는 그 꽃잎들이 지는 걸 굳이 지켜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나도 나이가 들고, 이제는 지는 꽃은 모두 화려한 옛 시절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두보의, 또 임방울의 가슴을 흔들었던 '낙화소식'은 수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날 청춘의 가슴도 똑같이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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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는 천년을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았으면 해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보고 싶은 거 다 보고요. 하지만 그런 낮을 보낸 날에도 밤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고, 그 밤에 대개 우리는 혼자겠죠. 그런 밤이면 아마 시간이 너무 많아서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거예요. 맞아요. 그래서 청춘은 무거워요. 빨리 늙었으면 싶기도 하고요. 그럴 때 저는 저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가 마음이 동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문장들에 줄을 그었죠. 그렇게 책에다 몇 번 밑줄을 긋다가 잠들고 나면, 또 새로운 날이 시작됐죠. 역시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은 나날 중의 첫 번째 날. 누군가에게 『청춘의 문장들』은 그 새로운 날에 돌이켜보는, 지난밤의 밑줄 그은 문장 같은 것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201 - 발문, 김애란 

집 앞에 학교 종은 어리 때 내가 반복해 들은 종소리와 같은 음으로 운다. 단 여덟개의 음표로 단조롭고 나른하게, 반음 플랫flat된 상태로 운다. 기진맥진한 권투 선수가 다시 링에 올라야 할 때 울리는 '땡'소리처럼 단도직입적인 게 아니라 체조 선수가 허공에 풀어놓은 리본처럼 운다. 마치 '시간'이 아닌 '시간의 테두리'를 흔들어 보여주듯. 그래서인지 아무 때고 학교 종과 무방비로 만나면 내 안에 애써 고정해놓은 어떤 울타리가 넘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틈을 타 여러 가지의 것들이 넘어온다. 그렇게 밀려오는 것 안에 정확히 뭐가 들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감정인 것도 같고 감각인 듯도 하고 정서 또는 기억인가도 싶다. 다만 내가 확실하게 알아챌 수 있는 건 그렇게 바깥에서 들어온 뭔가가 내 안에 마련해주는 '빈 공간'이다. 들어와 자리를 '채우거나' '차지하는' 게 아닌 '자리 자체'를 만들어주는. 고요하고, 고유한 상태를 독려해주는 무엇. 그 기분이 익숙해 내가 이걸 언제 느껴봤더라 고민했더니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문장들. 좋은 문장들을 읽었을 때. 



206 - 발문, 김애란

"내가 바다는 건너는 수고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쉬운 말 같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처럼 단순한 말들을 어렵게 이해해가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요즘 나는 '우리는 누군가와 반드시 두 번 만나는데, 한번은 서로 같은 나이였을 때,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상대의 나이게 됐을 때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살다 보면 가끔은 두 번째 만남이 훨씬 좋기도 하다는 것도. 그 '좋음'은 슬픔을 동반한 좋은인 경우가 많지만. 이곳에 나보다 열 살 많은 선배가 10년 전에 옮겨놓은 문장들을 들여다보다, 결국 우리가 청춘에 대해 말한다는 건 아버지에 대해 말한다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어머니 또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리고 그게 한 시절 우리를 그토록 빛나게 한 여름의 속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새삼 다시 궁금해졌다. 시간은 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인생은, 삶은 때떄로 우리 앞에 어떤 얼굴로 나타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