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책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 표백, 장강명.

Kate.J 2014. 2. 24. 12:38


표백

장강명

한겨례출판




51

"넌 한 1,000년쯤 전에 태어났어야 했어. 정복 전쟁이라는 게 벌어지고 있던 시대에 말이야."

군대가 근대화되기 전, 대량 살상 무기가 나오기 전, 개인의 무용(武勇)이라는 게 의미가 있었을 때, 나라와 부족들이 별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게 당연할 때, 인류가 야만과 관료주의의 중간 상태에 있을 때. 

"왜 그렇게 생각해?" 

너는 속박을 싫어하고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야. 한편 세상의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실제로는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간파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기도 하지. 그런 태도는 허ㅜ주의로 이어질 수 밖에 없고, 너는 어떤 고상한 명분을 받아도 거기에 진심으로 공감하지는 못할 거야. 조선의 독립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모의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너는 아마 속으로 웃음을 참거나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할 거야. 이론과 방법론을 가지고 논쟁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너는 입만 산 놈들 이라며 그들을 비웃고 자리를 뜰지도 몰라. 네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폭력으로 이뤄진 세계지. 승자가 패자에게 싫은 일을 강요하는 게 당연한 세계에서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싸우는 투쟁이야말로 네가 유일하게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야. 그런데 그런 투쟁이 벌어지는 세계는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어" 



77

"가끔 내가 세상에 뭘 보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렸을 때 나는 사람이 저마다 검거나 붉거나 푸른 색깔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 색들이 어울려서 세상이라는 화폭에 어떤 이미지를 그려낸다는 상상을 했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압도적인 재능을 펼쳐 그 주변으로 그 개인이 지닌 색의 빛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렸어.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81 

세연이 나나 휘영을 이용한 것은 얼마간 정정당당한 게임이었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자기파괴 성향이라는 폭탄을 안고 있으며, 저마다 각자의 뇌관을 지니고 있다. 나의 뇌관은 아마 폭력 성향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별다른 이유 없이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데에서 쾌감을 얻었으며, 언제나 질서보다는 무질서를 선호했고, 제대로 자리 잡히고 정돈된 것을 못 견뎌 왔다. 



199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 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313

세연의 야심이 어린아이다운 것이었다는 휘영의 지적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어른스럽게 삶을 사는 법을 세연에게 보여줬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 주위에는, 아니 한국 사회 전체에 그렇게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따. 

휘영의 지적이 빛이 바랜 까닭은 그가 비겁자라는 비난을 들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겁내서 세연과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휘영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주간지 기자 일에 그렇게 열과 성을 다 바치는 모습이 그 증거다. 그걸 시시한 인생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319

재키는 표백 세대의 본질이 좌절감에 있다고 이해했고, 그래서 야심은 있지만 그걸 구체화할 방도가 없는 영리한 젊은이들에게만 관심을 뒀다. 그녀의 자살 선언에도 일종의 엘리트주의가 깔려 있다. 그건 분명 재키 자신이 엘리트였고, 자신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대화나 논쟁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재키는 오만했다. 

제리는 다르게 생각했다. 표백 세대의 고통은 좌절이 아닌 굴욕에서 비롯된다. 야심이 있든 없든 이 세대는 모두 굴욕을 당할 운명이며, 이에 대한 저항에는 모든 젊은이가 동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실 선언을 주창할 사람은 엘리트가 아닌 젊은이들도 이해하고 그들과 연대해야 했다.